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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중국여행기

중국여행기-세계적인 도시 뻬이징 하나!

by powernomics 2009. 8. 4.

 4박 5일의 연수중 3일 째 부터 북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의 경험이 별로 많지 않은 관계로 북경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가장 와보고 싶은 곳이었거든요. 특히 중국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코스라고 할 수 있는 만리장성과 천안문광장 그리고 자금성 등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연수가 개인적인 여행이 아니라 연수인지라 첫날 첫 방문지는 북경현대자동차공장이었습니다. 중국은 자동차산업과 같은 전략산업에 외국기업이 진출할 때는 반드시 현지 기업과 합작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물론 합작을 하더라도 지분율이 50%를 초과해서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계자에 말에 의하면 지분율은 반이지만 북경현대자동차에서 창출되는 이익의 절반 이상이 한국현대의 몫이라고 하네요. 예를 들자면 설계나 엔진등과 같은 핵심 기술은 모두 한국현대의 기술을 쓰고 있는데 기술 사용료와 로얄티 등과 같은 것으로 이익 중 많은 부분이 한국 현대에게 지불된다고 합니다. 중국이 자동차 기술 등과 같은 첨단 기술 부분에서 우리 나라에 뒤져있는데 솔직히 쌍용자동차에서 보듯이 핵심 기술 이전에만 관심이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걱정이 되기고 하였는데 관계자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되기도 하고 새삼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더군요.

 

 북경 현대자동차에서 자부심을 안고 방문한 곳이 중국의 양심적 인사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천안문 사태를 주도하였던 북경대학입니다.

 북경대학은 과거 원명의 일부였던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국 최고의 엘리트를 배출하는 중국 인문학 최고의 대학으로서 중국의 변화를 주도하는 지식을 많이 배출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인지 대학의 부지가 과장을 조금 보태어 우리나라의 조그마한 군 정도의 부지와 비슷할 정도로 넓었고, 대학 건물들은 날고 보잘 것 없듯이 보였지만 100년이 넘는 역사에 걸맞게 곳곳에 역사적인 유물이 위치하고 있는 등 오래된 연류이 묻어나는 대학이었습니다.

 

 

 

 학교 가운데는 넓은 호수가 위치하고 있고 계곡도 잇어 북경학생들은 물론 주변 지역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었습니다.

 북경대학교의 100년이 넘는 역사를 시기별로 전시해 놓은 북경대학교 역사관에 들러 1898년 창설된 경사대학당()시절부터 1912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에 수반하여 베이징대학으로 개칭되었기 까지 등의 역사를 북경대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 유학생으로 부터 들었습니다.

 

 

 

 

 중국인들의 자존심 북경대학을 뒤로 하고 중국 방문 세번째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이화원이었습니다. 이화원은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처음 조성되어 1750년 청나라 건륭제() 때 대폭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칭이위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860년 서구 열강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가 서태후(西)가 실권을 쥐고 있던 1886년 재건되면서 이허위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로 이곳에서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허위안에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 본격적인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모시켰다고 하네요. 이허위안 재건비용 때문에 청나라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대한 자금을 들였다고 합니다. 사실 후일 들른 자금성도 그렇지만 이화원도 보통 체력이 아니고서는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더군요.

 

 

 

 

 이화원에서 특히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곳은 쿤밍호라고 하는 호수였습니다. 쿤잉호 북쪽에 있는 약 60m 높이의 완셔우산()도 있더군요. 이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이고 산이라고 합니다. 쿤밍호에 가득찬 맑은 물은 그 당시 백성들의 피눈물이었고 완셔우산은 피눈물 속에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가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과거 조상들의 피와 땀이 후손들에게는 축복이 되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의 경복궁 처럼 말이지요.

 

 

 

 

 

 

 또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서태후 침실 앞에 있는 패망석이라고 하는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돌 앞에서는 중국사람들은 전혀 기념촬영을 하지 않더라구요. 패망석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옛날 북경대학 부근에 아주 부자인 지방유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노변에 있는 이 바위를 보고 하도 탐이 나 자기 집에 가져다 놓았는데 나중에 건륭황제가 어머니를 위해 별장을 짓게 되자 이 돌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옮기는 작업기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거니와 하도 커서 지름길로 가져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이화원까지의 지름길에 있는 모든 집의 담은 허물고(백성의 원성을 삼) 옮겨 왔다.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나 일을 마친 후 자기 집에 돌아가니 자기집은 패망이 되었더라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부터 바위를 가까이하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이 바위를 중국인들은 패망석이라 부르며 이 바위 앞에서 사진찍기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이번 중국여행에서 늘 관광지를 갈 때마다 물론 홍코우공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예외지만 느끼는 것은 중국인구가 정말로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관광지를 둘러보앗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 느낌. 와! 정말 많다! 라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한족은 1명, 다른 소수민족은 2명의 자녀를 갖는 것으로 제한하고는 있지만 세계의 유수한 여러 기업들이 중국에 몰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많은 인구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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