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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해외여행기

그리스 여행 셋! 코린토스 유적

by powernomics 2018. 8. 8.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 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많은 고전과 유물 및 유적으로 고스란히 인류에게 남겨져 있는데, 코리토스 유적도 그 한가지에 해당한다.


       지금은 인구 3만의 지방 소도시이지만 코린트는 기원전 6, 7세기에 인구 60만이 넘었던 부유한 항구도시였고,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도시국가였다고 한다. 심지어 성서에는 코린트가 사람이 몰리고, 상업이 성하고, 돈이 넘치고, 타락한 도시라고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구 코린트는 1858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1928년과 1933년에 각각 지진과 대화재로 파괴되어 다시 재건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남아 있는 유적만으로는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도시였던 그 시절의 도시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가 않다.


     ▲ 글라우케 샘, 뒤로 아폴론 신전이 보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는 아무 이유없이 생긴 것이 없다고 한다. 풀 한포기 돌 하나하나에도 그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이곳 코린토스에 어울리는 말 인 것 같다. 지금은 여기 저기 부서진 벽돌들과 돌기둥, 조각상들이 산재해 폐허로 변해 있지만 부서진 돌덩이를 통해 3000여년의 코린토스의 화려한 역사를 느껴볼 수 있다. 


   ▲ 고대 코린트 시장이 위치했던 장소


   코린트 유적 중에서 가장 백미는 B.C. 6세기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건설한 아폴론 신전으로, 그리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건축 당시에는 38개의 원주로 된 신전이었으나 현재는 굵직한 도리아식 원주 7개만이 남아 있다. 자른 돌을 이어서 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아폴론 신전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아폴론이 인간들에게 신의 뜻을 묻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해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 코린토스 유적지에 남아있는 아폴론 신전, BC 6세기에 건설되고 BC 46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고대 코린트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해상 도시로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고대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이후 쇠락하다 BC146년 로마의 공격에 파괴되었고 B.C. 44년 로마 황제 시저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코린트 고고학 유적지는 코린트시에서 약 8km 떨어진 아크로코린트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오랜 명성에 비하면 유적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당시 중심도로 주변으로 배치되었던 아고라와 신전, 분수, 바실리카 등의 흔적을 더듬으면 도시의 큰 그림을 그려 본다. 그래서 그런가 무너진 뼈대만 남은 건물들, 주변에 굴러다니는 대리석 조각들과 기둥들을 보니 여행자의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그래도  옛사람들의 삶의 기억과 그들의 발길이 머문 곳이라고 생각하니 내딛는 발자국 하나 하나가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 신전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고대 코린트 유적


     2천년 동안 흑 속에서 인간에게 그 모습을 허락하지 않다가 최근에 발굴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흔적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 그리스 고대 도시가 대부분 그러듯이 도시의 중심에는 신전이 있고 있고 신전을 중심으로 관공서들이 있는 거리와 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처럼 이 코린트 지역도 어느 곳에 땅을 파도 고대 유적이 쏟아져 나온다고  하니 이 곳이야 말로 역사의 보고가 아닌가?

▲ 아고라에서 코린토스 항구까지 뻗어있던 레카이온 거리 





     코린토스 유적 뒤편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Sisyphos)의 산이 보인다. 시시포스(Sisyphos)는 코린토스를 건설한 왕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의 신 티나토스를 속여서 가두게 된다. 아내에게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고 미리 당부하였는데 그 핑계로 지상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 장수를 누린다. 결국 죽음의 신이 갇혀 있어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고 시시포스(Sisyphos)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바위는 힘들게 굴려 올려도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이를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어 시시포스는 영원히 바위를 굴리는 고통을 받는다. 시시포스가 꿈꾸었던 영원한 생명 대신 영원한 고통과 무의미한 노력이 그에게  선사된 것이다. 지금도 시시포스(Sisyphos)의 형벌은 계속 집행되고 있을 듯 싶다. 그의 형벌은 신을 속인 죄 때문에 내려졌지만, 사실 그가 이승에서 갖가지 악행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죄를 속죄하고 정화하게 하려는 신의 응보였는지도 모른다.  


▲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모습, Tiziano Vecellio(1490~1576), 프라도 미술관


         그런데 시시포스(Sisyphos)산은 신화적 상상과는 달리 높이는 580m에 불과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나무도 자라지 않은 거대한 바위덩어리일 뿐이다. 아쉽게도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시시포스(Sisyphos)산에 올라보진 못했지만 시지포스산 꼭대기에는 아프로디테의 신전과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고라광장과 사도 바울이 재판받았다는 연단 베마(Bema), 뒤로는 시시포스(Sisyphos)산이 보인다.


   아고라광장 중앙에 연단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이 곳은 시민들의 화합을 도모하는 여러 행사가 열리거나 재판정으로 이용된 곳이라고 한다. 특히 이 곳은 갈리오가 총독으로 있을 때 크린토스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여 재판을 한 자리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 등장하는 도시 '고린도"가 바로 코린토스이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하던 52년에 코린토스를 방문하고 이후 3차 선교 여행의 귀환길에도 코린토스를 방문해 코린토스 교회의 문제점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당시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던 코린토스에는 1,000여명의 여사제 또는 창녀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의 눈에는 코린토스는 온갖 음행이 자행되는 도시로 보였을 것이다.


베마(Bema)의 연단 위 모습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에는 코린트 유적지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다양한 조각 작품들과 테라코타, 도자기, 모자이크화, 프레스코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그리스 각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은 발굴된 지역에 박물관을 세워 발굴된 지역에서 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실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의 외관을 보면 우리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이 곳이 중요한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막상 진열된 유물을 관람하다 보면 전시된 유물 하나 하나가 모두 국보급 유물이라는 것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 고대 도시 북쪽에서 발굴된 2-3세기의 석관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에는 대리석으로 된 조각상들이 꽤나 많은데 옷을 입은 조각상들의 조각상들을 보면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옷의 주름과 구겨짐 등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음 볼 수 있다.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의 두상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뜰에는 목이 없는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목이 없어 이 조각상들의 표정은 가늠할 수 없지만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의 주름과 동작이 매우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각상들의 목이 없는 이유는 당시 조각상 전시가 유행하면서 조각가들이 미리 머리가 없는 신체 조각만 제작해 두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두상을 조각하여 조립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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